편지 산업의 전망에 대한 간단한 생각

디지털의 물결은 많은 사양 산업을 만들었다. 신문이 대표적이다. 편지는 어떨까? 둘 다 종이를 쓰니, 사이좋게 줄었을까? 신문과 편지를 비교해 본다.

신문의 목적은 정보 전달이다. 전달되는 정보는 내용이 변하지 않아야 하며, 널리, 빨라야 하고, 편리해야 한다. 때문에 과거 신문은 말言과 소문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어 이제 디지털 기사가 신문을 대체하고 있다. 

편지는 어떨까? 같은 종이다. 그러나 결은 다르다. 공적인 편지를 빼면, 편지는 정보가 아닌 감정의 전달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감정이란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다. 종이라는 물성, 보낸 이의 손 글씨 같은 특별함은 전달되는 감정과 뗄 수 없다. 때문에 편지는 디지털 매체로 대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편지 산업은 성장할 것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관계의 단절은 현대사회의 근본 문제다. 그리고 고립은 감정 교류의 횟수 자체를 떨어뜨렸다. 기술 발전은 다양한 소통 수단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피상적인 관계만 늘었다. 잃어버린 관계를 따라 편지 수신인도 줄었다.

그렇다면 단절을 극복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더 가까워진다면 편지는 더 많이 쓰일까? 그것도 아니다. 편지는 과거 거리라는 물리적 제약의 극복에 사용되었을 뿐, 이젠 사람 몸이 더 편하게 이동하는 시대다. 직접 만남보다 편지가 더 좋을 순 없다.

마지막으로 편지는 하나의 미디어일 뿐,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미디어로 잘 소통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헷갈린다. 누군가는 현대인이 고립되고 소외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SNS 안 세상은 폭발적인 교류로 가득하다. 그저 취향이 변하듯 미디어도 흘러간다는 건 어떤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라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편지는 그 나름의 애틋함과 감성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편지의 그 확고한 영역과 의미를 바라본다.

사업이 속한 산업의 전망은 중요하다. 그러나 전망을 떠나 내겐 편지 사업을 시작한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는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한다) 다만 배는 탔고, 그 미래를 낙관하는 건, 분명 세상은 더 좋아졌음에도 우리는 점차 행복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편지가 그 해결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정리하자면 나는 현대사회 흐름에 반하는, 편지와 오래된 가치들의 복권을 바란다. 동시에 그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한 명으로 그 가치를 더 많이 이야기 하려 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좋다고 여기는 세상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편지의미래

색색의 파라솔이 늘어선 남대문 시장
남대문시장에서, 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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