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파트, 봄, 그리고 수채화 모임

나는 당신과 함께했던 아파트에 다시 왔어요. 그날도 햇살이 따스했죠. 우리는 첫 수채화 모임을 가던 길이었어요. 

모임을 같이 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웃겨요. 당신은 입버릇처럼 꼭 그리고 싶은 풍경이 있다고 했어요. 사생대회가 자기의 마지막 작품활동이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금방 그릴 수 있다며, 어려울 거 하나 없다고 큰소리쳤죠. 그래 놓곤 잊을만하면 내게 그림 모임을 같이 가자고 했죠?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귀찮았던 것도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당신에게 푹 빠질지 전혀 몰랐으니까요. 

결국 당신이 이겼어요. 우리는 처음 들어본 동네의 작은 수채화 모임을 등록했고, 때마침 봄꽃들은 천천히 피고 있었죠. 지하철 출구 위로 당신의 얼굴이 빼꼼 보였어요. 붓이며 빠레뜨며, 한 번도 열지 않은 물감들로 빽빽한 캔버스 백을 멘 당신의 눈동자엔 기대가 한가득 담겨있었죠. 얼마나 기다렸는지 당신은 금세 저만큼 가버렸죠. 그리곤 몇 번씩 뒤를 돌아 다시 나와 걸음을 맞췄죠. 같이 걸을 땐 늘 천천히 가자며, 급할 게 뭐 있냐던 당신이었는데 말이죠. 

당신은 몇 번이나 와본 것처럼 지도도 안 보고 휘적휘적 잘도 걸었어요. 저쪽에 있겠거니 하면서 가면 된다고 했죠? 나는 새로운 곳이라면 지도에 부족하면 거리뷰까지 봐야 하는데 말이죠. 나는 비슷비슷한 아파트와 골목 사이에서 오래전에 길을 잃었어요. 그리고 그 아파트도 내겐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작스럽게 나타났죠. 

길게 이어진 갈색 벽돌의 담 창살 사이로 흐드러진 개나리가 해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어요. 아파트 외벽 위 菊花라 커다랗게 적힌 이름은 색이 다 바래가고,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칠과, 그 아래 희미하게 놓인 무늬는 세월을 머금은 주름처럼 물이 다 빠져 축 흘러내리고 있었죠. 그날따라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기억나요. 연녹색 기와가 차곡히 쌓인 아파트 현관은 햇볕 아래 조용히 서 있었죠. 

우리는 화단 사이 사분원이 끝없이 교차하는 자줏빛 보도블록을 따라 현관 계단을 올라갔어요. 빈 경비실엔 낡은 서류들과 볼펜 몇 자루가 책상 한 켠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죠. 누렇게 바랜 인터폰 옆엔 똑딱이 스위치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이따금 빨간 불빛들이 깜빡거렸죠. 짙은 밤색의 알루미늄 문을 밀자 반질반질한 도끼다시의 냄새를 머금은 시원한 습기가 볼에 닿았어요. 

우편함엔 광고지와 편지들이 들쑥날쑥 꽂혀있었어요. 엘리베이터 위엔 1, 3, 5, ... 가 적힌 작은 등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죠. 금이 간 플라스틱 버튼을 누르자 5에 서있던 노란 불이 왼쪽으로 한 칸씩 움직였어요. 9층은 9층에서 내려 계단 반 층을 올라가야 했죠. 군데군데 크레파스 선이 그어진 서늘한 벽을 따라 봄바람이 불어왔어요. 902호의 벨을 누르고 우리는 창문도 없는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군데군데 빛바랜 상처가 난 반원 모양의 진녹색 울타리는 키 작은 회양목을 품고 있었어요. 화단의 마른 잎들 위로 목련의 꽃봉오리 속에 봄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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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푸른 빛의 봄의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있는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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