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듦'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

물듦이란 단어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좋아합니다. 지금은 더 좋아하게 됐죠. 

지금도 글을 쓰지만, 한창 글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글은 뭐랄까, 끝없이 뻗어나가는 생각을 급하게 받아적는, 동시에 술술 빼내는 도구에 가까웠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글이라는 생각은 1도 없었습니다. 이미 타이핑 된 문장 따윈 전혀 돌아보지 않았으니까요.😇 

그 생각들 속에 물듦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전에 결혼이란 단어 따윈 없는 사람이었고, 매일 밤 빌려 탄 자전거로 거리를 쏘다니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 세상은 어떤 곳인지 묻고 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생각도 큼직한 단어들로만 했습니다. 글마다 '세계'라든지, '본질' 같은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턱턱 썼으니까요. 그리고 세계와 본질이 만난 곳에 물듦이 있었습니다. 그건 물과 아메리카노를 구분하는 문제에서 시작되었죠. 

제게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1 샷을 물에 탄 음료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샷을 줄여나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다행히 ½ 샷은 '아메리카노-연하게'라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유지하더군요. 하지만 ¼ 샷이라면 '이건 보리차인가요?' 같은 클레임이 저를 기다릴 겁니다. 문제는 ½ 이나 ¼ 샷도 눈대중 따라 조금씩 변하고, 어떤 사람에겐 ⅓ 샷이 취향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의 꼬리를 쫓을수록 아메리카노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기분이었죠. 

결국 저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아메리카노는 만든 사람, 먹는 사람, 그날 기분 등등에 따라 부르기 나름이군―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실제 세계의 그 음료(자신이 뭐라 불릴는지 아무 관심 없는)가 아메리카노와 보리차와 맹물 사이의 물들어있는 공간 어딘가에 멀뚱히 서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곳에선 끊임없이 반듯한 절취선들이 그려지지만 그건 마치 다른 레이어 속 작업인 양, 실제 세계는 수채화처럼 물든 그 모습 그대로였죠. 

실제 세계는 물들어있다―라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흡족한 그림을 만든 저는 아메리카노나 물의 구분 따윈 그만두고 주는 대로 맛있게 먹자―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듦에 대한 상상은 이를테면 "그래, 딱 잘라 무조건 옳고 무조건 그른 것도 없겠군" 같은 판단의 연기 같은 생각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한참을 지나 '연애'나 '결혼' 같은 단어가 추가된 개정판 사전이 발간되고, 어찌저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정작 와이프에겐 한 번도 이 상상을 끝까지 설명해 본 적 없지만, 물듦이란 단어는 참 많이 썼습니다. 제 머릿속에 박혀있어서 그런지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쓸 때마다 "나는 너에게 점점 물들어가고 있다"는 둥,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우리가 너무 좋다"는 둥, 나름 발음도 괜찮고 모양도 이쁘고 하니 편지에 쓰기 딱 좋은 단어였죠. 결국 성혼선언문에까지 썼으니 그 정도면 와이프와 저의 공동 사전에서는 단물 다 빠진 단어라 봐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다시 뒤적인 메모장엔 제 결혼에 대한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모든 관계는 우리를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로 바꿔버린다. 마치 두 가지 색이 물들어 서로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키듯, 시간은 느릿하게 그것들을 휘젓는다. 누구, 어떤 것과 오래, 혹은 깊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더 많이 물들어가는 것임을 느낀다. 

만남, 그리고 새로운 삶의 지점은 커피 맛에는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 아메리카노와 물의 구분 방법 위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라는 따듯한 서사를 덧입혀 주었습니다. 정말 제 삶이 물들어 있는지, 아니면 저 자신을 물듦에 끼워 맞춘 건지는 알 수 없을 겁니다. 확실한 건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 때문에 물듦은 제 삶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다는 사실 뿐이죠. 

사랑하는 누군가와 물듦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할 때마다 그 위에는 각자만의 마음이 또 쌓일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둘을 담은 물듦을 아마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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